
AFK arena & journey
서하
:: 프라벨, 휴윈, 라이카 ::
<희망을 알고 있어서>
“제, 제가… 과연 도움이 될까요?”
“으응, 당연하지. 오히려 휴윈의 도움이 없으면 곤란해지는 걸?”
“정말로 그렇다면……”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지금 들려줄 질문을 한다면, 십중팔구는 주저 없이 답을 외칠 것이다. 나머지 한두 명 이래봤자 ‘뭐 이런 쉬운 질문을 하는 거지, 일종의 농담인가?’라는 속내를 고스란히 비추며 고개 갸우뚱하고 있을지도.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나? 에스페리아 대륙에서 한 해 중 가장 성대한 명절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있다면, 마치 동전의 앞뒤처럼 처음부터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법. 매해를 마무리할 12월 하순, 곳곳에 환한 등불을 밝히는 성대한 겨울의 절정- 바로 ‘한겨울 축제’가 있음에야!
특히나 자연을 가까이하고 숲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와일더스에서 이 아름다운 축일에 작은 등불이며 수정 장식, 갖가지 색의 리본으로 화환을 만들고 나무를 장식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전통인바. 축제가 오기 한참 전부터 와일더스는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답고 화사하며 완벽한 축제 기간을 보낼 수 있을지 골몰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애어른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누가 제일 고운 꾸밈을 해내나 비교하며 신바람을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을 곳곳은 물론 사람 자주 오가는 숲길이나 길목이다 싶으면 이정표가 될 만한 나무마다 앙증맞은 화환 한둘씩, 부들부들한 리본끈 서넛씩 달려있는 시기다.
그나마 이렇게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 한복판에서 한 걸음 떨어져 일정하게 차분함을 지키는 곳이라 하면, 그나마 고운 금발의 수줍음 많은 주인이 지내는 연인의 소원쯤이었을까. 근처 주민들도 이 선령이 얼마나 낯가림 심한지를 잘 아는 까닭에, 아무리 한겨울 축제라 한들 이곳까지 열심히 꾸미겠답시고 들쑤시면 아예 물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끙끙 앓을 것을 염려해, 오히려 가장 한가하고 수수한 공간이곤 했던 터였다. 그렇다. 과거형의 표현이다. 이제는 아니게 될 거란 소리다. 본인의 귀여운 학생들과 손수 준비했다며, 프라벨이 한아름 화환을 끌어안고 나타난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한 시간 전이니까.
하지만 당연하지! 다시 말하지만, 방문객이 다름 아닌 프라벨이잖나. 언제나 사랑스럽게 웃는 얼굴로 누구보다도 뛰어난 친화력을 뽐내는 그 프라벨! 일전부터 안면이 있던 드문 인사라, 서슴없이 다가오는 인기척에 깜짝 놀라 물가 깊숙이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던 휴윈도 결국은 반가운 미소를 슬며시 띤 채 작은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았을 적엔 이미 양손 가득 이런저런 등불이며 리본이 들려 있고, 어느새 홀린 듯 부탁을 수락하겠노라 고갤 끄덕이고 있는 본인을 발견했을 뿐이다. 하여 안 그래도 동그란 휴윈의 눈이 더욱 동그래진 순간, 프라벨은 명랑한 태도로 외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한겨울 축제 기념 깜짝 티파티 위원회가 만들어진 거네. 비밀 엄수를 위해 인원은 우리 단둘뿐이지만. 잘 부탁해!”
그리하여 얼마 후 휴윈은 여전히 동그란 눈으로 열심히 손뼉을 치는 본인을 다시 발견했을 뿐인, 그런 단순한 이야기이다.
첫 번째 준비-작전!
전날 함박눈이 펑펑 내렸음을 이용, 근처의 눈을 뭉쳐 귀여운 눈사람 잔뜩 만들기!
“사실 오늘 같은 정도의 추위면, 휴윈이 조금만 슬픈 생각을 해도 알아서 비가 눈으로 변하는 거 아닐까?”
“……해, 해드릴까요?”
물론 휴윈은 그렇게 억지로 슬픈 생각을 떠올리는 대신, 눈사람의 입꼬리를 방긋 웃는 것처럼 올려 장식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아 훌륭히 수행했다. 주변의 나뭇가지를 꽂아 손을 만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프라벨의 학생들이 고사리손으로 열심히 만든 유난히 자그마한 화관은 눈사람마다 꼭 맞았다.
두 번째 준비-작전!
잘 익은 산열매가 지천으로 깔린 비밀 장소에서 점심 식사하기!
그리고 휴윈은 이 숨겨진 비밀 장소를 발견한 순간, 타란 강 근방은 누구보다도 훤히 꿰고 있다는 자신감이 살짝 흔들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프라벨이 프라벨인 것을! 프라벨이 직접 만든 샌드위치는 아주 달아서, 겨울에 가장 불그스름하니 새콤해지는 이 열매를 후식 삼아 한껏 해치우기에 좋았다.
세 번째 준비-작전!
진지한 얼굴로 잘 깎은 연필을 들고 서로의 캐리커처 엉성하게나마 그리기!
하지만 나중에 두 사람은 서로뿐만 아니라, 당장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겨울 풍경은 물론이요, 여러 등불과 장식과 꽃과 잎사귀, 별과 달과 눈송이, 기타 등등 아무튼 채울 수 있는 대로 귀퉁이마다 꽉꽉 그려 넣는 데 열중했다. 본인의 종이를 넘어 상대의 종이까지 사이좋게 머리 맞대고 그려 넣고야 말았음이다. 그나마 휴윈의 그림은 본인이 늘 들고 다니는 커다란 잎사귀가 사인처럼 남았고, 이를 부추긴 프라벨도 커다란 방울꽃을 마찬가지로 사인처럼 남겨두어 해당 종이의 원주인만은 간신히 구별할 만했다.
이어지는 작전들도 대개 그런 식이었다. 소소하고, 귀엽지만, 소꿉장난 같았다. 마지막 작전은 두텁게 빙판이 깔린 시냇가로 가 동그랗게 얼음을 깨고 맑은 물을 수통에 가득 담아오는 것이었는데, 솔직히 이 정도야 주의만 충분히 기울인다면 프라벨의 학생들도 충분히 해낼 법한 간이한 작전들이었다. 그 점을 문득 깨달은 휴윈이 고개를 조금 들어 열심히 물을 뜨고 있는 프라벨을 바라보았지만, 시선을 알아차리고 마주해오는 시선이 못내 상냥하여, 어쩐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피었다. 그리고 그건 정말 정답일 테다. 휴윈이 그 생각을 미처 말하지도 않았건만, 알아차린 것처럼, 프라벨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으므로.
흩날리는 눈. 맺히는 눈꽃. 그리고 백색으로 물드는 나무들. 상당한 추위 속에서도 어쩐지 맑고 해맑은 웃음 나는 건, 어쩌면 시냇물 암만 꽁꽁 얼어도 그 아래 맑은 물 잘도 흐르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이 겨울이 반드시 끝이 나 파릇한 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서. 또 다르게는 이 겨울 이리 후딱 지나버려도 내년의 겨울이 오리라 그때도 이 좋은 이들과 함께하고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어서겠지. 더욱 간단히 말하면, ‘희망’을 알고 있어서.
전혀 외롭지도 심심하지도 않지만, 동시에 느긋하고 상냥하기 이를 데 없는, 축일 전날이었다.
자. 그리고 딱 여기까지만 같이 살펴보자. 간신히 책상을 뒤덮었던 서류의 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마지막 장에 이름을 써넣은 라이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스물네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 도통 제가 이겨 먹을 수 없는 선배 프라벨이 보냈다는 편지가 제게 도착한 뒤로, 일을 하고 집중이 안 되어 큰일이다 싶었다. 그렇다고 편지부터 펼쳐 읽자니 대체 어떤 내용이 있어 저를 당혹하게 할지 가늠이 안 되어, 억지로라도 급히 서류를 해치워본 게 지금이다. 참 골치다 골치, 하는 한탄을 내어두면서도 라이카는 서둘러 편지를 개봉했다가. 곧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리고야 만다.
“이게 뭐야? 티파티 초대장? 달랑 용건이랑 장소, 시간만 적혀 있고 나머지는 그림이 잔뜩이네. 아. 설마 이 토끼 귀 그림, 나를 그려낸 거야?”
도톰한 케이프를 두르고 길을 타박타박 나서면, 정해진 장소로 가기 위한 유난히 한적한 지름길의 초입부터 못 보던 눈사람들이 띄엄띄엄 놓인 게 보인다. 마치 처음부터 어서 오시라, 얼른 오시라, 그런 환영의 말을 내어두고 있는 것만 같다. 유쾌한 기분으로 눈길을 빠져나올 즈음이 되면, 그때부터는 슬쩍 예민한 후각에 맡아지는 희미한 단향이 있다. 이 시기에 가장 맛있는 산열매로 파이를 산처럼 구웠기라도 한 모양이지, 하고 그래도 프라벨을 오래 따랐던 라이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낸다. 그야 티파티라니 맑은 물로 우린 차뿐만 아니라 곁들일 간식을 준비하는 게 맞겠지마는.
이윽고 마주한 문을 여는 라이카의 손길에 망설임이 없다.
“역시나 일찍 왔네! 그럴 줄 알고 우리도 미리 차와 간식을 준비했지만. 어서 안으로 들어와, 라이카. 안 그래도 네가 보고 싶어 할 만한 이들이 곧 여기에 도착할 거라는 연락을 받았어. 맞아. 네 말대로 그렇게 모이는 건 꽤 오랜만이지. 하지만 당연하잖니? 너도 알다시피 오늘은 한 해 최고의 명절, 사랑스럽고 소중한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는…….”
탁, 열렸던 문이 얼른 닫힌다. 잘 데워진 실내의 온기가 반쯤 언 방문객을 감미롭게 덮친다. 저항할 수 없이 달콤하고 눅진한 향도 함께이다. 곧 세 명분의 웃음소리가 다시 섞인다. 높낮이도 성량도 느낌도 다르지만 그렇기에 더욱 유의미한 것. 동시에 성에가 낀 유리창은 스노우 트리, 거대한 황혼의 나무를 얼핏 비추었다가……
“새해에도 잘 부탁해.”
더욱 환해진 등불로 인해 그야말로 별빛인 양 반짝거린다.
그런 나날이었다.
